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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y Novel

Stories
(younjin.jeong@gmail.com, 정윤진)




이런 저런 책을 굳이 가려서 읽는 편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판타지 소설을 읽으면 무언가 덕후의 느낌이 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실 타인에게 권하기도 좀 그렇고, 내가 느꼈던 감상이 그들에게도 그대로 전달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기에 아주 친한 지인이 아니라면 굳이 읽어봐라 한마디 던지지 않았던것도 사실이다.

글이 전달하는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인간이 인간에 대해 품 어야 하는 올바른 감정, 그리고 세상과 자아에 대한 면밀한 탐구를 진행하는 철학등은, 하나의 이야기 로 전달 될 수 있고,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책과 영화등의 미디어를 통해 전달받고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소설이나 시놉시스가 우리가 살고있는 또는 살았던 시대에 있었을 법한 일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별도의 세계관을 가질 필요 없이 그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것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저항없이 이야기에 몰입하고,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이라는건,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 내야하고, 그 허구의 세계관 속에 우리가 보고 느꼇던 것들을 적당히 얼버무려냄으로서, 독자가 이 소설속의 인물들과 교감하려면 이러한 허구의 세계를 상상해 내고, 이해 해야만 한다. 하지만 세계관이란건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의 일반/특수 상대성 이론이 지배하고, 냉전의 시대를 거쳐 이르른 현대의 우리가 매일 뉴스로 보고 접하는, 우리가 살아왔던 모든 시간동안 보고 느껴왔던 것을 통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세계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판타지에서는 어떤가. 전설의 드래곤과, 대부분이 총보다는 마법검과 마술, 승마, 갑옷 이러한 것들이 통용될 수 있음직한 세계가 있다 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하는 것이며, 만약 이러한 내용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면 감정이입은 커녕 "말도 안되는 소리" 라며 책을 덮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작가에 의해 창조된 세계관이 다소 허술하거나 빈약하게 된다면, 신기하리만큼 그 집중도를 떨어트리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 세계관의 창조 작업은 매우 중요하며, 이러한 세계관이 오밀조밀하게 잘 구성된 소설의 경우 엄청난 히트를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영도님의 "드래곤 라자"를 어린 시절에 참 많이 읽었는데, 이는 전체 이야기의 굵은 선이 매우 일관적이고, 인물의 묘사가 뛰어나며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덧붙이는 이야기들이 매우 정교하다. 따라서 첫장부터 등장하는 마법이나 몬스터, 드래곤 등에 대해 "후드가 달린 망토를 입은 마술사", "괴물같이 생긴 인형 생물", "날개달리고 똑똑한 유조선만한 도마뱀" 등의 이미지를 충분히 그릴 수 있다면, 소설이 이야기하는 가치관과, 세상에 대한 작가의 시각을 충분히 즐기며,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이 수월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열광하거나, 아니면 아예 소설의 제목만으로 읽어서는 안될 책으로 치부하는, 크게 보면 두 종류로 나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소설들은 보통 세계관을 독자에게 이해 시키기위해, 또는 설명하기위해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주로 모험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구성은 일견 무협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무협지를 스스럼없이 읽는 사람은 판타지도 별 무리없이 잘 읽어 내는 듯 하다. 아무튼, '드래곤 라자' 와 전민희님의 '세월의 돌', 이 두개의 소설이 내게는 재미있었던, 그리고 몇차례 다시 읽다 보면 그 내면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도 숨어있을 법한 것들이었다.

드래곤 라자



드래곤 라자의 경우엔, 마치 호텔 레스토랑의 잘 차려진 정식 코스를 먹는 기분이다. 처음과 끝이 깔끔하며, 이야기 전체의 각 부분에 작은 기승전결과 이야기 전체의 기승전결이 존재함으로서 그 짜임새에서 오는 재미가 크고, 상황과 인물의 묘사, 그리고 사건을 대하는 주인공의 가치 판단에 저어함이 없는, 그야 말로 정찬과 같은 소설이었다. 그 세계관의 묘사와 모든 지명, 인물에 대한 작명법 그리고 이야기 안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뛰어난 구성은, 저 뛰어난 김용의 그때 짜맞추는 듯 하지만 재미있는 소설을 뛰어넘는다.

이와 반해 세월의 돌은, 비극적인 결말의 무협지의 성격을 띈다 라는 느낌이 강하다. 주인공은 모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빠른시간에 성장하며, 그것이 타고난 핏줄의 영향인데다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거의 마지막 순간에 반항한다. 작가님은 결말을 예견해두고 전체 이야기를 구성했음이 분명하지만, 그 최종의 비극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이 짙은 여운은 전체 이야기가 마치 높은 곳에서 낮은곳으로 물체가 떨어지며 속도를 확보하듯이 진행되는 듯 하다가, 결국 땅바닥에 부딫혀 산산히 조각난다. 이는 전체 이야기를 이루는 몇가지 목적, 크게 모든 종족을 구해낸다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사랑 모두에 반영된다. 하나가 깨졌기 때문에 다른 하나도 깨져야 한다라는, 복선으로 예견되었지만 최종회의 급 이별은 그 진행의 과정이 수긍하기 힘들다. 힘들다 라기 보다는 굳이 수긍하고 싶지 않다. 더군다나 영화나 소설의 여주인공은 굉장한 미인이었을때, 문제가 생기면 슬픔이 배가되는 공식이랄까. 주인공들은 뭔가 불안해 보이는 영원을 약속하고, 결국은 깨어지고. 주인공은 무언가 불안해 보이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 깨어지고.



따라서 세월의 돌 같은 경우에는, 다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사실 희망을 갖기는 힘들어 보인다. 노력했지만 가장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게되는, 그 이후의 과정도 갑작스럽게 3인칭의 시점을 빌려 모호하게 마무리 해 버리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저, 모든 내용은 최종의 마지막에 눈물을 짜내기 위한 구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과 배신이 들정도로, 하지만 진정 그런 감정이 느껴지는것도 어쩌면 슬픈영화 보면서 눈물 빼는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그렇지?
- 세월의 돌, 유리카

판타지 소설이라는건 결국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밑바탕의 영역까지 상상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리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높은 이야기의 자유도를 선사한다. 그 즐거운 상상의 영역으로 빠져들어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 큰 즐거움일 수 있으며, 사람은 기본적으로 희망적인, 즐거운 방향의 상상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이 비극으로 끝 나버린다면 거기서 오는 충격은 '악마를 보았다'와 같은 영화에서 오는것에 비해 크게 느껴진다. 유리카와 파비안의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눈물짓는 남자 주인공만이 남았을 뿐이다. 후치와 헬턴트영지의 미래는 그들의 여행은 끝났지만 밝았다. 

서른이 넘어 스무살 무렵 군대가기 전에 읽었던 소설들을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야기의 완성도는 제쳐두고, 두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이 서로 반대되는, 이를테면 드래곤라자는 주인공의 분노로 시작하지만 평안으로 끝을 맺고, 세월의 돌은 평안으로 시작하지만 슬픔으로 결말이 지어지는, 이 두개의 재미난 이야기들은 삼십대 초반의 나에게도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어보인다.

뭐, 사실 우리 사는 세상이 판타지처럼 돌아가는데 굳이 책에서까지 찾아낼 필요야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것도 나이가 조금 더 들었기 때문에 그런것만은 아닐게다. 좋아하는 사람이 사라진다는건, 가까이 있지만 오감을 통해 인지 할 수 없다는건 꽤나 슬픈 일이라는 걸, 또 그런일에 아직 휘둘리는 나이라서 그런건 아닐까.

내 손에는 유리카의 엔젠이 꼭 쥐어져 있었다. 녹색의 보석... 그리고 그녀의 녹색 눈동자... 잊지 않을꺼야. 잊혀지지 않을 거야.

모든 것이 끝났고, 나는 처음처럼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 세월의 돌



비오는날 코드보다가 급 센치해져서...
뭐 길게 썼지만 난 슬픈 사랑 이야기는 싫은거다.  그냥 그런거다.

(younjin.jeong@gmail.com, 정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