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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가기 읍기'에 해당되는 글 1건

  1. 장마가 질 무렵

장마가 질 무렵

Stories



(younjin.jeong@gmail.com, 정윤진) 


본 이야기는 철저한 픽션이며, 뻘글이 고파 그냥 한번 끄적여 본 이야기임을 밝힌다. 

내용은 실제 어느 누구와도 관련이 없으며, 오글거리더라도 방법이 없음.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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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밤의 날씨라는 것이 끓는 가마솥과 같아서 습하게 후덥지근 하다가도 갑자기 한번씩 내리는 소낙비나 장맛비에 콧구멍이 시원해 지는 때가 있는 법이다. 오늘도 종일 후덥지근 찜통같은 날씨였지만, 저녁 무렵쯤 되고보니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이 장대비가 내린다. 그러면 하던일을 놓아두고 익숙한 동작으로 서랍에 감춰 두었던 담배를 꺼내 물고 돌아 앉아 시원하게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본다.


'그래, 이맘때였지' 


매년 한여름 이맘때 비오는 날만되면 여지없이 그 생각이다. 벌써 마흔, 이 잊혀지지않고 다시 돌아오는 계절에 비내리는 날이면 한대씩 물고 빠는 탓에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다며 공연히 탓이다. 쏴아 하고 비 쏟아지는 소리에 기분이 상쾌해 질 법도 하건만 씁쓸한 기분에 담배를 비벼끄고 일이나 해 보겠다고 돌아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트북의 터미널 창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옛일을 떠올리는 중이다. 


'에이, 오늘은 일 못하겠구만.' 


이 나이가 되면 친구녀석들 모두 먹고사느라 여간 바쁜게 아닌데다가 이제 막 너댓살 된 자식키우며 마누라등살에 시달리느라 전화도 받지 않는 법일 터이지만, 벌써 이러고 살아온지도 십수년이 지나고 보니 받지 않거나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전화를 무조건 걸어 보면 누군가는 응답을 의례 주는것을 경험으로 알게되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 전화 번호부를 긁어내어 개중에 그나마 사장질을 하고 있는 친구를 찾아 전화를 걸어 낚시질을 한다. 


'어, 그래 무슨일이야?'

'전에 막걸리나 한잔 하자고.' 

'웬 전에 막걸리? 아… 비오는 날이라 또 병이 도졌구만. 알았네' 

'거기서 보지.'


거실 선반위의 자동차키를 집어 들다가 오늘은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택시를 불러 내리는 비를 뚫고 약속장소로 가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아, '그럼 많이 마시진 말지 뭐' 하고 내심 스스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는 차에 시동을 건다. 김이 서려 에어컨을 틀고 엔진이 예열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폭포수 같이 앞유리에 쏟아지는 빗물의 아지랑이를 보며 잠시 또 생각에 잠긴다.


그러기를 오분여, 정신을 추스르고 와이퍼를 돌려 앞유리의 물기를 닦아내고 라디오를 켜고 나서 출발한다. 평소와 같으면 등 뒤에서 그르렁대는 엔진소리에 흐뭇한 미소를 한번 지었겠지만, 오늘은 오히려 감정이 차분해진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블루컬러들과 넥타이부대들이 벌써 삼삼오오 모여 한잔씩 걸치는 중이다.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직장 상사 이야기, 자식이야기, 마누라 이야기들을 헤집고 비내리는 풍광이 잘 보이는 구석진 자리를 하나 찾아 앉는다. 


'여기 알밤 막걸리랑 두부김치 하나 주세요.' 


주문을 시키고 전화기를 살펴보니 운전하며 오는길에 부재중 전화가 한통이 있다. 빗소리와 엔진소리에 묻혀 듣지 못했던 딸아이의 전화다. 이제는 벌써 열일곱살이 되어 제법 처녀티가 나는 딸아이는 언젠가부터 철이 들었는지 혼자사는 아비를 챙기려는 양 가끔 전화를 하고는 한다. 어려서부터 바쁘게 산다고 항상 잘 챙겨주지 못했는데도 큰 탈없이 잘 커주는 기특한 녀석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바로 다시 전화를 걸고 싶지가 않다. 대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십오분이나 더 있어야 도착 하겠다는 대답을 듣는다. 


주문했던 술과 음식이 나와 막걸리를 대접에 한가득 따른다. 건배를 할 상대도 없이 한잔을 들이킨다. 시원하고 고소한 막걸리가 목줄기를 타고 흐른다. 그러기를 연거푸 세번이나 했을까. 거세진 빗방울은 바닥에 튀어 무릎 높이나 되는 운무를 만들고 있다. 그래, 비오는거 참 좋아했었는데. 쏴아 하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소리 사이사이에 번쩍이며 번개도 친다. 


'야 이자식아 넌 뭐 이런날에만 호출이냐.'

'어, 왔냐?' 

'하여간 청승이야.'


간단히 서로 안부를 묻는다. 


'요새 사업을 잘 되냐?' 

'응 식구들 입에 풀칠은 한다.' 

'그럼 된거지.'

'너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십오년도 넘게 보아온 녀석이지만, 씁쓸함을 넘어 우울해진 기분에 오늘따라 해줄 말이 없다.


'일이야 언제나처럼 잘 되지.' 

'애는?'

'무섭게 큰다.'

'공부는 잘 하고?'

'마셔 임마'


술잔이 몇차례 돌고나니 얼큰히 취해 오는것이 예전같지 않다. 한참을 마시다 말고 그칠줄을 모르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녀석이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너 그때가 언제였지? 삼성동에 혼자 살때?' 

'서른 다섯 전이지.'

'그때 일 때문에 그런거냐?' 

'아니야...'


다시 막걸리를 서너잔 정도 더 들이킨다. 오랜만에 보는 녀석이지만 서로 사는 이야기가 뻔해서일까. 굳이 숨겨야 할 일도 아니건만 이 이야기만 꺼내지면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래.'

'초여름이라 날씨가 아직 선선할 때였지. 바람도 솔솔 불고.' 

'좋구나.'

'저녁에 함께 걷는데 가로등 불빛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도 참 좋았지.'

'그랬겠네.' 


막걸리 한병이 더 비워진다.


'지금은 뭐한데?' 

'모르지. 원대로 애 낳고 살았으면 이제 대여섯살쯤 되었겠네.' 



술이란 마시면 마실수록 옛 기억을 끄집어 내는 법이다. 어느덧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넥타이 부대들도 사라지고 우산없이 짧은 치마로 뛰어다니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빗방울도 살그머니 잦아들고, 빨강 초록 하얀색의 각종 네온사인들과 전광판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바닥에 흐릿하게 비춰진다.


'그러고 보니, 넌 사별한게 언제지?' 

'어디보자… 애가 두돐 전이었으니 이제 한 16년쯤 되었나.' 

'그것도 이맘때 아니었나?'

'그렇지, 그것도 칠월, 법원이 구월이었네.' 

'…그렇구먼. 연락은 없고?'

'글쎄, 그 사람도 어디서 잘 하고 살겠지. 궁금하지도 않네.'


술이 얼큰하게 오른다. 예나 지금이나 안주는 별로 집지 않고 술잔만 오고가니 단골집 주인 아주머니가 걱정하는 눈치다. 


'그만 할까?' 

'그래 나가자.'


비오고 난 뒤의 습하고 상쾌한 바람이 분다. 얼굴에 안개가 닿는듯한 기분에 잠시 눈을 감아 본다.  

식당 주인께 부탁해 서로 대리기사를 부르고, 담배를 사이좋게 하나씩 문다. 비가 얼마나 왔는지 담배갑 안에서도 눅눅해진 담배서 빨아지는 연기가 진하다. 한숨과 함께 짙은 연기를 내뿜는다.


'근데 넌 별것도 없었으면서 뭘 그렇게 오랜동안 비만 오면 이러냐?' 

'사람 마음이란게...'

'희한한 놈이다 참.' 

'그러게나 말이지.'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난일, 잊혀지면 아쉽다고 잡고 있어봐야 좋을것도 없단다.' 

'그러네. 비가 문제야 비가.' 

'비가 오면 비 때문이고, 눈이오면 눈 때문이라 하지 않겠나.' 

'살다 보면 이렇게 탓하고 살 일도 생기는 법 아니겠나.'

'아무튼 청승은....' 


대리운전 기사가 도착하고 아쉬워 할 겨를도 없이 만났을때 처럼 아무일 없었다는 듯 친구를 보낸다. 수더분하게 생긴 인상의 대리기사는 사람도 별로 없는 비가 쏟아지는 날에 맞이한 손님이 그저 반가운양 마냥 싱글벙글하며 친절하다. 뒷좌석이 없는 차의 조수석에 몸을 깊게 묻는다. 기사에게 대충 방향을 알려주고 창밖을 주시하다가 취기가 올라 잠이 막 들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아빠!' 

'응 그래 무슨일이니?' 

'비오는데 어디서 뭐해?' 

'친구랑 술 마시고 들어가는 길이야. 너는 어디니?' 

'학원 갔다가 이제 집에 왔어. 술 많이 마셨어?' 

'응 조금.'

'내일 학교 끝나고 학원 땡땡이 칠거니까 밥사줘.' 

'넌 그게 학원비 내 주고 있는 애비한테 할 소리냐? 할머니한테 이른다.' 

'칫' 

'그래, 누가 널 이기겠니.' 

'아싸, 그럼 아빠 집에 가서 바로 자고 내일 전화해.'

'그래.'



창가에 부딫혀 오는 빗방울 사이로 번지는 도심의 불빛이 술기운에 아름다워 보인다. 집으로 향하는 삼십여분 남짓의 길에는 익숙한 많은 풍광이 지난다. 

싱글벙글했던 대리기사에게 몇만원 쥐어서 보내고 집에 들어오니 격한 비에 젖은 바짓단과 신발이 그제야 느껴진다. 오랜만에 마신 술이 차에서 잠깐 자느라 깼나보다. 십수년전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이후 바짓단이 이렇게 허리춤까지 젖어 본 적이 없건만. 





젖은 신발과 눅눅한 바지를 벗어내고 대충 씻는다. 멀쩡한 침실 놔두고 컴퓨터가 있는 서재로 향하니 낮에 켜놓은 그대로 커서가 깜빡인다. 소형 냉장고에서 기네스 한캔을 꺼내 따고,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굳이 잊혀진 기억을 하나씩 살려본다. 항상 이렇게 비오는 날에 취해서 들어오면, 그 비는 멈추는 법이 없이 번개와 천둥을 한번은 보여주는 것이 이것도 참 잊어버리지도 못하게 그 사람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고약한 날씨 중 하나다. 입버릇 같던 '빗소리와 천둥소리를 자장가 삼아 잘텐데.' 



Divorce. 



어린날에 누구나 한번쯤 겪는 불같은 사랑이 만들어낸, 그래서 근 20년간 나를 성숙하게 하고 괴롭게도 했던 과거. 모든것을 책임 질 수 있을 것이라는 어렸던 생각과, 그 나이에 감당 할 수 없었던 사실의 충격에 휩싸여 모든것이 폭발했던 그 경험, 수십년에 걸쳐 낙인이 되었던 기억은 누가 옆에서 무슨 말을 하건 하지 않건 40대가 된 지금까지 달고 다닐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수식어가 되었다. 그것은 기실 사람을 발전하게도 만들었으며 좌절하게도 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들처럼 강해질 수는 없었던 것이, 바로 이제는 열일곱이나 되어버린 딸아이에 대한 윤리와 도덕, 그리고 책임감이 앞서지 않았겠나 하는 망상을 해 본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좋은것은 금방 잊어버리고 나쁜것을 더 오래 기억하는것 마냥, 그로 인해 겪었던 모든 아픔들은 간혹 현실을 수긍하지 못하게 하고 끝없던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날들 속, 바로 그 한 중심에 칠년전, 삼성동과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분명 짧았지만 아팠으며, 그토록 강렬하지 않았던가. 




책장 유리에 비치는 강한 여름의 햇살에 잠을 깬다. 반쯤 비워진 맥주캔과 밝은 햇살 사이로 떠다니는 공기처럼 가벼운 먼지들 그리고 언제나처럼 깜빡이는 커서가 반긴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네시. 간만에 기절하듯 잠이 들었었구나 하며 정신을 추스리려는 순간, 허기를 느낄 틈도 없이 전화기가 울어댄다. 


'아빠!' 

'응 그래'

'언제 올꺼야?' 

'지금 간다, 가.'

'얼른 와. 와서 전화해.' 

'알았다. 한 30분 걸릴거야.' 


잠에 취한 갈지자의 걸음을 힘들게 옮겨 샤워실로 간다. 샤워기 꼭지에서 쏟아지는 찬물에 머리를 들이대니 정신이 확 난다. 씻고 나와서 청담동의 레스토랑에 예약을 한다. 평소에는 잘 가진 않지만 일년에 한두번, 이렇게 딸아이가 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르거나 또는 누군가를 - 보통 여성이었다지 - 소개받는 자리가 생길라치면 예의 찾아가곤 하는 고기 한덩이 값 치고는 제법 비싸게 받는 집이다. 


대충 주워 입고 차고에 나가 시동을 건다. 어제와 달리 등뒤에서 울부짖는 엔진 소리와 진동이 경쾌하다. 비를 잔뜩 맞게해서 서운한 모양이었던지, 악셀을 살며시 밟을 때 마다 RPM 이 솟구친다. 그래 이녀석아 미안하다고. 일년에 몇번 없는 일이 잖니. 좀 봐주렴. 라디오를 켜고 기어를 넣어 기분 좋게 딸아이의 학교로 출발한다. 달릴때는 엔진의 울부짖음이, 정차 할 때는 늦은 오후의 라디오 DJ 목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교문이 교복입은 아이들을 토해내듯 쏟아내는 풍광을 잠시 즐기고 있자니 저 멀리서 반갑다며 소리를 지르는 딸아이가 보인다. 제 할머니와 살기에 또 바쁘다는 핑계로 달에 한두번 보면서 키웠던 딸아이가 어느덧 저렇게 컸구나 하는 감상이 새삼 익숙하다. 매번 다름을 느끼는데서 익숙함을 느낀다는것은 참 신기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이미 아이는 한달음에 달려와서 차의 조수석을 꿰찬다. 


'아빤가봐' 


하는 아이들의 일렁이는 목소리들을 뒤로한채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는다. 


'언제 왔어?'

'방금' 

'나 뭐사줄꺼야?'

'고기 먹자. 먹던거.' 

'그래.'


간단한 행선지에 대한 대화를 나눈 후, 시동을 걸어 출발하자 마자 아이의 입놀림이 바쁘다. 베프가 이랬다느니, 선생님이 어쨌다거니 성적이 어땠는데 할머니가 어쨌다는 둥 하는 누가 십대 여자애 아니랄까봐 쉬지도 않고 재잘거린다. 굳이 대꾸할 거리도, 요새 고등학생에 대한 정보도 없어 입을 다물고 그냥 웃기만 한다. 원래 조용한것을 좋아하지만 한번씩 이렇게 보면 쉬지도 않고 떠드는 아이가 하는 말을 들어라도 줘야 하지 않겠나. 아마도 제딴에는 반갑다는 표현인듯 싶기도 하다. 


예약된 장소에 도착하고, 발렛을 맡긴 후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입구에 전시되어 있는 와인들, 많지도 않은 자리에 벌써 데이트를 하는지 사업을 하는지 않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을 지나 고풍스런 탁자에 익숙하게 펼쳐져 있는 묘한 재질의 테이블보 앞에 앉는다. 



어디선가 아련한 웃음 소리가 들린다. 높은 하이톤의, 분명 존재감 있는 어디선가 들어본 웃음. 


비와 천둥과 번개가 좋다던, 감기가 걸리면 뱅쇼를 만들어 먹어야 하는데 시나몬 스틱이 없다던, 모 아니면 도 같은 성격이라 얼음 호랑이 같은 영일씨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던, 배려를 가르쳐 주겠다며 '옳지', '잘한다' 하던. 우산이 있어도 비에 잔뜩 젖었던 그날, 모든것을 바꿔 놓았던 바로 그날 이후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등 뒤 어디에선가 들리고 있다. 얼굴을 마주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온몸이 무언가에 휩싸이듯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다. 그간 기억나지도 않았던 수많은 기억이 번개처럼 지나가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몇개월 되지도 않는 사이에 그토록 흔들렸고 또 그 흔들림으로 좌절했던, 그가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딸아이의 존재를 어려워 했기에 관계를 접을 수 밖에 없어 평소 그 어느때보다 더 스스로에게 좌절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칠년전 징그러웠던 인연이 지금 이 공간의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웃고있다. 


'아빠, 왜 그래? 어디 아파 갑자기?' 

'아… 아니야. 괜찮아.' 


이상한 눈길로 살피는 아이는 칠년전 이맘때 어떤일이 있었는지를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을테다. 떨리는 손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진정하려는데 음식이 나온다. 


'주문하신 시저 샐러드 입니다.' 


무심코 얼굴을 보고 한번 더 놀란다. 이번에는 놀랐다기 보다는, 경악에 가까워 표정이 자연스레 일그러진다. 17년동안 연락 한번 없었던, 너무 지독한 결말로 인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던 바로 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너무 놀라서 말도 못하고 빤히 쳐다보니 그도 알아봤는지, 접시를 놓으려던 동작이 멈춘다. 


'왜 그래 아빠, 아는 사람이야?' 


아이의 '아빠' 하는 부름에 그는 이윽고 테이블에 내려 놓던 접시를 결국 떨구고 만다. 쨍그랑 하고 요란하게 본 차이나 사기 그릇이 깨지는 소리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우리 테이블에 집중된다. 홀 매니저가 앞에서 다가오는 것이 보이고, 동시에 높은 웃음 소리가 났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본다. 또 한번, 다른 사람의 눈과 마주쳐 서로를 알아본다.  


다시 고개를 돌려 충격과 경악에 휩싸여 죄송하다고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바라본다. 아이와 번갈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꼴을 보자니 매니저도 무슨 사정이 있는가 보다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 눈이 있는터라 죄송합니다를 연발한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야.' 


결국 외면하고 만다. 


'매니저세요? 이분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는데 음식 다시 주시고, 좀 모셔가세요. 불편하네요.'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금방 처리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떨리는 손으로 물잔을 잡는다. 젠장, 왜 하필 지금 이 장소에서 저러고 있담. 

사람들은 다시 원래 하던일로 돌아가 누구는 먹거나, 누구는 마시고 누구는 대화를 한다. 그 와중에 한 무리의 여성 그룹에서 훤칠한 키의 사람이 테이블로 다가온다. 


'맞구나, 딸이야? 엄청 예쁘네.' 

'어, 그래… 많이 컸지.'

'그러네. 넌 어떻게 잘 지내?' 

'어, 그냥 지내지.' 

'근데 아까 그분 왜 그랬데? 나 여기 단골인데 이런거 처음보네. 사과는 받았어?' 

'어 그렇지 뭐.' 

'명함 있으면 하나 줘. 나중에 뭐라도 마시자.' 


명함을 건네고 아이에게 눈웃음을 던지고 돌아서는 고고한 걸음이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다시 친구들에게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파묻힌다. 


'누구야?'

'…. 있어 예전에.' 

'그럼 저 주저 앉은 아줌마는 누구야?' 

'…..'


굳은 표정으로 식사를 끝내고 차량을 내어달라 한다. 익숙한 엔진음 소리가 들리고, 계산을 하고 일어선다.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테이블에는 전부터 이 가게에서 보아두었던 2002년 빈티지를 한병 보낸다. 날듯이 아이를 데리고 나와, 차에 태우고 어머님 댁으로 향한다. 얼른 벗어나고 싶었고, 빨리 벗어나야 했다. 과거의 기억으로 잊혀져 가던 많은 것들이 현재 모두 변해버린 모습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표정으로 저 안에 모여있었기에. 


질문 가득한 아이를 어머님께 맡겨 두고, 이번에는 빗방울이 아니라 그렁해진 눈물에 네온사인과 반대편으로 달리는 차량의 빛망울이 섞여 번진다. 

누구에게서인지 걸려오는지 모를 전화에 휴대전화가 울부짖지만, 지금 받아보고 싶지는 않다. 누구던지간에. 


라디오에서 노래가 울려 퍼진다. 

'언제나 다시 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17년전, 또 7년전 그때처럼, 다시 장마가 오고있다. 


(younjin.jeong@gmail.com, 정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