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카테고리 없음(younjin.jeong@gmail.com, 정윤진)
바람이 거센 가을이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공동 현관문을 나서면 기다렸다는듯 차디찬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그런 바람을 맞으며 계단을 걸어 내려가 아파트 단지 사이의 길을 따라 편의점으로 향하다 보면 싸늘한 추위가 자켓안으로 스며든다.
편의점에서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한갑 산다. 2019년 11월 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커리어에 대한 고민으로 년초부터 이곳 저곳면접을 보았더랬다. 어떤 회사는 스타트업 어떤 회사는 대기업, 어떤 회사는 전에 다니던 외국계 회사들 이었다. 사실 즐겁지만은않았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나의 장래와 더 이상 합치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괴로운 자각 같은 것이었달까.
훌륭한 회사지만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눈 앞이 어두웠다. 좋은 동료들이 많아 어떤 일을 성공으로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런 동료들이 생기기 전에 했던 일들의 많은 부분을 덜어내기도 해야 했다.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누어 보자면, 회사에서 일하는 개인들은 무엇을 팔거나 또는 무엇을 만드는 일로 나뉜다. 2013년 이전의 나는 무엇을 만드는 사람이었으며, 2013년 이후로 나는 만든 경험을 바탕으로 파는 일을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파는 사람은 언제나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좋은 부분만을 이야기하게 된다. 대부분의 판매직에 있는 사람들은 그 상품이나 서비스가 가진 취약점이나 문제에 대해 먼저 언급하지 않는다. 당연히 누구도 판매에 문제가 발생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서비스나 상품을 구매한 측에서는 언제나 문제에 마주한다. 그것이 그 제품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건, 제품자체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건 간에 문제와 마주한다. 이런 문제와 마주한 고객을 대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그런 문제가 발생한 경우, 내가 고객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궁리해야 하는 것도 필수적인 부분이다. 어떤 기술이 원하는 기능은 구현했지만, 원치 않았던 부차적 문제를 함께 가져오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커리어에 대한 고민은 여기서 시작이었다. 예전에 무언가를 만들고 매일매일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위치에 있었을때에는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는데, 무언가를 파는 입장에서는 매일매일 새로운 기술을 배워 시장에 알리는 일만 하지 않는가 하는그런것이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사실 나쁜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해당 기술을 배우고, 익혀서 소개하는 것은 적절한 시점에잘 이루어진다면 매우 뿌듯한 일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왜 그 기술이 새로 발생했으며 어떤 사업적 이유에서 필요했기 때문에 등장했는가에 대해서는 수동적일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거꾸로 어떤 서비스를 직접 개발하고 운영하는 경우에는 기술에 대한 필요가 간절하다. 매일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아! 이런 기능이 있었다면!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떤 기술에 대한 깊이 자체가 다를수 밖에 없다. 어떤 이유에서 어떤 기술이 필요했는데 이제 생겼네! 하는 필요와 충분의 조건에 다름아니다.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직접 개발하고 운영하는 서비스에 대한 욕심이 점점 더 커졌다. 내가 직접 만들고 고쳐야지, 내가 직접 문제들을 해결해야지 하는 욕심들 말이다. 하지만 이미 판매를 주로하는 직업을 가진 상태에서 나를 받아주는 회사들은 별로 없었다. 실무는 손 떼신지 오래 되었네요, 매니저 경력은 도드라지지 않네요, 이 일 할수 있으시겠어요?
나는 내가 언제나 쓸모가 있는 기술자이기를 바랬다. 어디서나 필요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 바램이 항상 무언가를 배워야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사실 더 젊을때는 새로운 무엇을 배우는 것이 강박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하나를 알고, 그 하나를 알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배우고 그래서 다른 하나를 새로 아는 과정은 괴로움이기보다는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많은 조직으로부터 필요한 사람이 되고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너무나 괴롭고 즐겁지 않았으며, 해법을찾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나는 어떻게 되고, 나의 미래는 어찌될 것인가 하는 고민들이 겹치고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며 더 이상 발전할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고민들이 매일의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의 나는, 2019년 11월의 나는 다른 나라에서 완전히 새로운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Senior Vice President of Technology & Operations in Development Bank of Singapore, Group Consumer Banking and Big Data Analytics Technology 라는 길고도 긴 타이틀과 직급이다.
장장 5개월의 면접, 오퍼, 그리고 비자까지 매우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차 있기도 하다. 나 개인으로서는 거의 10년만의 서비스 운영, 그리고 수많은 개발팀에 필요한 도구의 제작, 그리고 동시에 내가 가장 잘 하는 분야로의다른 나라에서 완전 새로운 도메인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좋은 직장을 원한다. 물론 나도 그러했다. 월급 80만원 받으며 공공기관의 석고보드 천장을 뜯고 카테고리 5의 랜케이블을 던지며 몰딩하던 시절에도 커널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80만원짜리 인생이기를 원한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것은 한달에 80만원을 벌고, 120만원을 벌고, 200만원을 벌고, 다시 300만원을 벌고 하던 성장의 단계다. 나는 매 성장의 단계가 나에게는 하나하나 소중했으며 격렬한 투쟁의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중했던 성장의 과정이 언제나 행복했던것 만은 아니었던것 같다. 물론 그도 그럴것이 위에는 언제나 그 위가 있으며, 나는 그생태계에서 계급의 착각만을 반복했던것 같다.
어쨌든 이제 또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 서비스를 맡아 개발할 때에도 그랬고, 생전 처음 보는 문제들을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들도 있었고, 수백의 사람들 앞에서 처음발표를 해야 했을때도 그랬으며, 그 발표를 다시 영어로 해야 할때도 그랬다. 저지르고 보는 나의 성격은 그 결과의 성패와 관계없이 저돌적이었고 무지렁이 같았으며, 그래서 겁나기도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을 함께할 수 있는 반려자가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거꾸로 그런 반려자가 있었다면 이토록 무모할 수 있었을까. 이지독한 혼자의 길을 항상 치유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런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그 지독함은 결국 새로운 도전으로만 연결되는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앞으로도 항상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디서나, 내가 위치한 자리 그리고 내가 잘 했던것을 누군가에게 필요당하고 싶다. 그것이 기술이건, 아니면 다른것이건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때가 온다면 보통의 슬픔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좌절과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슬픈 사람임을 깨달았다. 내 외로움은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인생의 동반자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좋아하는 것에 더욱 집중하고 더욱 강렬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원동력이 슬픔이라는 것은 다소 안타까울지 모르나, 도전과 실패의 총합은 나를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진정으로 나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에게 고마워보는 밤이다. 그리고 지난 모든 사람들에게도.
나의 미래는 고독과 외로움 위에 명예롭기를 바란다.
그냥 그렇다고.
새 직장 주소.
(정윤진, younjin.jeong@gmail.com)